티스토리 뷰

목차



    낙원

    낙원은 199년에 발표된 작가 압둘라 자크 구르나의 대표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유수프라는 소년의 눈을 통해서 유럽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탄자니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식민지의 아픔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탄자니아의 역사와 문화의 단절, 주인공의 이름에 대한 생각, 자유가 주는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탄자니아의 역사와 문화의 단절

    식민지 문학이 대개 그렇듯이 이 소설 역시 식민의 아픔을 겪었던 아프리카 동남부 탄자니아의 경험이 잘 녹아들어 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유수프는 10대 초반의 나이에 부모를 떠나 해안가의 부호 아지즈의 자택에서 지내게 되고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장사를 배우게 됩니다. 내륙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을 상대로 교역을 하는 모습은 분명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보이는 그들 고유의 삶의 방식입니다. 유수프는 비록 부모가 빚을 갚지 못해 대신해서 아지즈에게 팔려오다시피 했지만 자유롭고 세심한 아지즈의 보살핌 아래 착실하게 장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가 유수프를 잠시 동안 하미드와 마이무나 부부에게 맡겨둔 것도 방치가 아니라 좀 더 견문을 넓히게 해주고자 하는 배려로 보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수년의 시간을 보내고 유수프도 적응을 완료해 상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이던 그때 마치 날카로운 가위로 싹둑 자르는 듯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독일군이 도시에 진입해 오면서 그야말로 도시는 쑥대밭이 되고 유수프의 앞날도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그 이후 유수프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전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식민통치가 식민지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과거와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입니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 맥락의 단절을 의미하고 문화가 이식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언젠가 유럽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젊은 사람들이 침을 뱉게 만들 거야.' 유수프가 아지즈 저택의 정원을 낙원으로 느꼈던 것처럼 탄자니아 사람들에게 낙원이었던 조국에 유럽인들이 진출하면서 그들은 단절을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단절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소설은 조용히 흘러오던 이야기의 흐름을 단칼에 잘라냄으로써 너무나 확실히 역사적 문화적 흐름의 단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에 대한 생각

    앞서 이 소설은 탄자니아의 역사적, 문화적 흐름의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이름에서 이런 부분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유수프는 요셉의 이름을 아랍어로 표기한 것으로 바로 성경 속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요셉의 이름을 따온 것입니다.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요셉으로부터 주인공의 이름만 떠오른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요셉의 삶을 거의 그대로 주인공에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유수프 모두 어린 시절에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고향을 떠나 먼 곳에 팔려가 생활하게 됩니다. 게다가 둘 다 준수한 외모에 매력적인 성품을 소유하고 있어 주인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또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도 유사합니다. 나중에는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받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요셉 같이 유수프도 안주인 줄레카의 유혹을 받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라고는 요셉이 그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갇혔으나 유수프는 주인의 신뢰를 잃지 않고 계속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에 불과할 정도입니다. 작가가 이슬람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모를 리가 없는 요셉과 같은 이름을 따고 같은 삶의 궤적을 보여준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 속 요셉은 이런 실현을 겪고 나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자기 민족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유수프의 이름과 삶의 궤적이 보여주는 유사성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대를 걸게 됩니다. 자기 민족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 속 유수프는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수프는 독일군이 도시의 진주에 들어오자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 속 요셉의 모습을 기억하는 독자들로서는 허망한 결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라나 바로 이 부분이 작가가 의도한 효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새 클리세의 단절을 통해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된 탄자니아의 허망감을 너무나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자유가 주는 고통

    주인공인 유수프는 내륙 여행을 끝나고 오랜만에 아지즈의 자택으로 돌아오는데 거기서 아미나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칼리의 여동생이기도 한 아미나는 안타깝게도 아지즈의 후처가 된 몸이었기에 그녀 역시 유수프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유수프는 칼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택 내부의 정원을 매일같이 드나들면서 줄레카 마님을 위해 기도한다는 핑계로 아미나를 보러 갑니다. 마침내 그는 아미나에게 자신과 함께 아지즈의 저택에서 도망치지 않겠느냐고 제안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사랑의 도피를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낙원은 어릴 때부터 부모를 떠나와서 지내게 된 아지즈 저택 내부의 아름다운 정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유수프는 아미나에 대한 사랑에 눈 뜨고 나서 그곳에서의 삶이 자유가 억압된 삶, 속박된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탈출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앞서 유수프의 이름을 성경 속 인물인 요셉에서 따온 것과 같이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처럼 유수프와 아미나의 도피를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에 비유한 것입니다. 아지즈의 밑에서 사는 것은 편하지만 자유를 잃어버린 삶이었고 그를 떠나는 것은 자유를 얻는 대신에 고통스러운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 그 이후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유를 외치지만 사실 자유를 얻음으로써 잃게 되는 것들도 꽤 많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거기에 수반되는 고통을 안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을 밝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