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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앞의생

    자기 앞의 생은 1975년 발표한 에밀아자르 작가의 장편 소설입니다. 에밀아자르 작가는 로맹가리라는 작가의 가명입니다. 처음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에밀아자르라는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로맹 가리가 죽음을 맞이한 뒤 그의 유서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이 책의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알아보고,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느낀 감상평을 적어 보겠습니다.

     

    자기 앞의 생 작가 에밀 아자르에 대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에밀 아자르를 검색하면 로맹가리라는 전혀 다른 이름이 검색 결과로 나옵니다. 사실 에밀 아자르는 로맹가리의 가명입니다. 로맹 가리는 191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러시아인입니다. 그는 인종 차별을 피해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13살 되던 해에 프랑스 니스에 정착합니다. 법학을 전공하기도 한 그는 21살 때 프랑스로 귀화했습니다. 로맹 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로지웅, 도네르, 무공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기도 합니다. 소설가로서 그는 일찍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1956년에는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으로 불어권 최고 권위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던 로맹가리에 대한 평가는 왜인지 어느 순간부터 혹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둘이 동일인임을 모르는 평단은 열띤 호응을 했습니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가리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가 권총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한 후였습니다. 자기 앞의 생은 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두 번째 작품입니다. 1975년에 발표된 이 작품 역시 공쿠르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미 1956년에 이 상을 수상한 로맹가리는 19년 만에 같은 상을 수상하게 됐습니다. 한 작가에게 두 번 이상 시상하지 않는다는 공쿠루상의 원칙이 이 작품으로 인해 깨졌습니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가리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공쿠르상 수상으로 인해 이 작품의 작품성은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과 줄거리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모함메드라는 이름의 남자아이입니다. 모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남자아이는 매춘부에게서 태어난 아랍계 프랑스인입니다. 그는 로자 아줌마라는 유대계 여자에게 거둬들여져 그녀의 아파트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로자의 아파트는 프랑스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롤라 아줌마, 하밀 할아버지 등이 살고 있습니다. 하층민들을 돌봐주는 유대계 의사인 카츠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모모의 친아버지로 추정되는 유세프 카디르도 등장합니다. 이들이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입니다. 10살 내외인 것으로 추정되는 모모라는 소년은 60대 유대인인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로자와 함께 사는 아이는 모모뿐만은 아닙니다. 모두 매춘부로부터 태어나 맡겨진 아이들입니다. 사실 로자도 젊은 시절에 매춘부 생활을 했습니다. 로자는 자신에게 위탁된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부는 여유로운 집으로 입양을 보내기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도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모모는 로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갖가지 특이한 행동들을 했습니다. 이러한 모모의 행동을 보고 로자는 그가 선천적으로 정신병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카츠라는 의사에게 모모를 데려가 진료를 받습니다. 카츠는 모모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자의 걱정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신경 안정제를 처방합니다. 한편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라는 노인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알제리 출신의 무슬림으로서 모모를 상당히 귀여워하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즐겨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 프랑스 니스에 가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며, 모모가 그곳을 동경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무렵 모모는 우산을 꾸며서 아르트르라고 이름 짓고, 그것을 이용해 거리에서 춤을 추며 동냥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딘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성우였습니다. 모모는 나딘이 일하는 녹음실에서 영화와 필름이 거꾸로 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로자 아줌마의 인생을 거꾸로 돌려서 젊음을 되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로자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됐습니다. 모모는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로자뿐이어서,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롤라 아줌마가 죽어가는 로자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로자의 건강은 일시적 회복과 악화를 반복하며 지속적으로 저하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세프 카디르라는 남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알고 보니 모모의 친 아버지였습니다. 로자는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모모를 떠나보내기 싫어서, 유세프에게 모세라는 유대인 아이를 그의 아들이라고 속였습니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유세프는 자기 아들이 유대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아 죽고 맙니다. 모모는 아버지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 없이, 자기 나이가 정확히 14살이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면서 너무나 고통을 받는 로자를 보면서, 모모는 차라리 안락사를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로자는 병원에 입원하는 게 싫어서 아파트에서의 생활을 계속합니다. 의사인 카츠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면서 로자를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하지만, 모모는 카츠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이스라엘의 친지가 로자를 초대했으니 그냥 두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모모는 죽기 직전이 된 로자를 아파트 지하실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로자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모모는 시골의 한 별장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과거 하밀 할아버지가 이야기했던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 살 수 없다는 말을 곱씹으며 이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감상평

    자기 앞의 생의 작가인 에밀아자르는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유추해 볼 때 그는 삶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작품 속에서 모모가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결국 작가는 삶이란 괴로운 것이고,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로자 아줌마를 보며 모모는 차라리 안락사가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삶이 로자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연명은 더 큰 괴로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하밀 할아버지가 왜 레미제라블을 끼고 살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작가는 이처럼 괴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를 불쌍한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으로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 살 수 없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와 했던 대화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모모에게 있어 사랑할 사람은 로자 아줌마였고, 로자 아줌마에게는 모모가 그 사랑할 사람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로자를 잃은 모모가 과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독자에게 막막한 느낌을 가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모가 정상적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를 불투명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표면적으로 이 문장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힘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하다는 뜻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더 의미심장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사람은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 이 말의 숨겨진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자살로 삶을 마감한 로맹 가리의 처절한 절규로 보였습니다. 삶을 사랑하지 않는데 자신이 어떻게 더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작가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두 주인공 모모와 로자가 왜 각각 아랍인과 유태인이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 프랑스인은 최소한으로 등장하고 있고 유대인, 아랍인, 아프리카인들이 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프랑스 사회의 비주류로서 매춘 등의 비참한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대인으로서 과거 나치 독일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되는 등 비참한 생활을 했던 로자의 모습을 모모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비록 민족과 종교는 다를지라도 프랑스 사회의 비주류로서 모모 역시 앞으로의 삶이 비참할 것임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유대인 로자와 아랍인 모모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쓰인 시기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을 치른 시기였습니다. 로맹 가리는 로자와 모모의 모습을 통해서 두 민족의 화해를 소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기 앞의 생은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